1. 디지털 사후 세계의 도래와 사후 인격권의 쟁점
AI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인간의 목소리, 외모, 말투, 사고방식까지 디지털로 재현하는 시대를 현실화시키고 있다. 특히 텍스트 기반의 챗봇은 특정 인물의 글쓰기 습관과 표현을 학습해 그 사람처럼 말하게 할 수 있고, 음성 합성 기술은 생전의 목소리로 고인의 목소리를 복원할 수 있다. 이른바 "디지털 복제 인간" 또는 "AI 고인"의 시대다. 이러한 기술은 교육, 추모, 기록 보존 등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한편, 고인의 명예, 사생활, 정체성 침해라는 심각한 윤리적·법적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생전에 명시적인 동의 없이 재현된 디지털 인격체가 원작자의 의도와 다르게 사용되거나, 상업적으로 활용될 경우 사후 인격권은 철저히 무시될 수 있다. 특히 고인의 의견이나 가치관이 왜곡되는 방식으로 AI가 작동할 경우, 그 명예는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을 수 있으며, 유족에게 심리적 충격을 줄 수도 있다. 이처럼 기술의 진보는 곧 사후 인격권에 대한 새로운 법적 보호 체계를 요구하게 된다.
2. 사후 인격권: 법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인가?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인격권’은 기본권의 핵심으로 간주되지만, 그 보호 범위는 일반적으로 생존한 사람에게 국한된다. 민법 제751조(손해배상)나 헌법상 인격권 조항은 대체로 살아 있는 개인의 명예, 초상권,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사망 이후에도 개인의 정보와 이미지, 콘텐츠가 디지털 상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으며, 이 정보가 제3자에 의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에 따라 ‘사후 인격권(posthumous personality rights)’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일부 판례나 입법은 이 가능성을 조금씩 열어주고 있다. 예컨대 연예인의 초상권을 사망 이후에도 유족이 상속하거나, 사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판례가 존재하며,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같은 일부 지역은 법적으로 ‘사후 퍼블리시티 권(right of publicity)’을 보장한다. 하지만 일반인의 경우는 여전히 그 보호의 범위가 불분명하고, AI 기술이 이를 악용할 여지는 충분히 존재한다. 특히 한국은 아직 AI가 고인의 목소리나 이미지를 재현했을 때 적용 가능한 법이 명확히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유족이 피해를 입어도 손해배상 청구 등의 현실적 구제 수단이 미비한 상태다.
3. AI가 복제한 ‘나’의 정체성과 윤리적 문제
기술이 사후 인격을 복원하거나 모사하는 사례는 이제 공상과학이 아니다. 이미 영국에서는 유명 작가의 필체를 학습한 AI가 새로운 소설을 ‘작가의 스타일’로 창작하기도 했고, 중국에서는 부모의 목소리와 표정을 학습한 AI가 사망한 자녀와 대화를 재현하는 디지털 ‘부활’ 프로젝트가 실험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술이 고인의 동의 없이, 또는 유족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될 경우 발생하는 윤리적 침해다. AI는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 인격은 복사된 데이터에 불과하지만, 사용자는 그 차이를 쉽게 느끼지 못하고 ‘고인이 살아 돌아온 듯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고인과 관련된 기억의 왜곡, 개인의 신념 조작, 발언 왜곡 등 여러 위험을 동반한다. 예를 들어 정치인의 디지털 아바타가 사후에 ‘새로운 발언’을 하면, 그것이 생전의 의도와 다르더라도 사람들은 진짜로 믿을 수 있다. 이처럼 사후 인격의 디지털 복제는 고인의 신뢰성, 정치적 중립성, 정체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 자체가 고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AI를 활용한 디지털 복제에는 최소한 생전 동의, 사용 목적의 명시, 유족의 사전 협의 및 정보 공개 등의 윤리적 가이드라인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며, 그 실행력 확보를 위해 법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되어야 한다.
4. 사후 인격권 보호를 위한 미래적 해법
AI가 인간을 흉내 내는 시대, 인격권은 생전과 사후 모두를 포괄하는 확장된 개념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첫 번째로는, 사전 동의 기반의 디지털 유언장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고인이 생전에 “내 목소리, 외모, 글쓰기 스타일, SNS 콘텐츠 등을 AI가 재현할 수 있다/없다”를 명확히 명시하게 하고, 그 효력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고인의 정보가 사용될 경우 유족이 그 사용 범위와 방식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상속형 인격권 제도의 도입이다. 예컨대 고인의 이름과 얼굴을 활용한 광고나 영상 제작이 이뤄지려면 반드시 유족의 동의가 필요하도록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플랫폼과 기술 기업에게 AI 학습 데이터와 결과물의 윤리성 심사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고인의 콘텐츠가 AI에 의해 재활용될 경우, 그 맥락이 고인을 존중하고 왜곡하지 않도록 사전 필터링이나 감수 체계를 도입하자는 취지다. 마지막으로는 국제적으로 사후 인격권 보호를 위한 다국적 협약 체계가 필요하다. 디지털 자산과 AI 복제는 국경을 초월해 작동하므로, 각국의 법이 따로 작용하면 유족 보호가 어렵다. 따라서 유네스코, OECD 등 국제기구 차원에서 ‘사후 디지털 인격 보호 선언’ 같은 윤리 선언과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각국이 이에 부합하는 법률을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고유한 인격은, 생전뿐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며, 기술이 이를 위협하는 시대일수록 법과 윤리가 더욱 정교하게 뒷받침돼야 한다.
'디지털 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NFT와 암호화폐, 사망 후 계승의 법적 허들 (2) | 2025.08.06 |
---|---|
디지털 자산에도 상속세가 붙을까? 법적 쟁점 분석 (8) | 2025.08.05 |
디지털 유산을 위한 ‘비상계획서’ 만드는 법 (13) | 2025.08.05 |
죽은 사람의 유튜브 수익, 누가 가져가나? (6) | 2025.08.04 |
내 계정은 몇 개일까? 디지털 자산 셀프 인벤토리 방법 (8) | 2025.08.04 |